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.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,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.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-대만 관계 (문단 편집) == 개요 == ||한국어||한대관계(韓臺關係)[br]한중관계(韓中關係, 주로 단교 이전)[* 여기서 '중(中)'은 [[대만]]을 지칭한다. 대한민국과 대만이 단교하기 전까지의 한중관계는 [[대만]]과의 관계를 지칭했다. 현재는 한중관계라고 하면 대체로 대한민국과 [[중국]]과의 관계를 지칭한다.]|| ||중국어(정체)||中韓關係[br]臺韓關係|| [[대한민국]]과 [[대만]]의 외교 관계를 서술한 문서이다. 양국은 단교하기 전까지 대체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이러한 우호관계는 [[일제강점기]]까지 거슬러 올라간다. 중화민국은 [[청나라]] 이후 [[제2차 세계 대전]] 때까지 중국 대륙을 지배했던 정부였다. 과거 일제강점기 중화민국 정부인 [[중국 국민당]] 정부는 [[대한민국 임시정부]]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으며,[* 이를 증명하듯이 중화민국의 총통이었던 [[쑨원]]과 [[장제스]]는 [[대한민국 훈장|건국훈장 대한민국장]] 수훈자이다.] 현재 대만이 통치하는 [[타이완섬]] 자체는 [[청나라]]의 지배를 받다가 [[청일전쟁]] 이후로 [[일본 제국]]의 식민지가 되었었다. 중화민국 역시 중국의 지배자로 군림하는 동안 [[중일전쟁]] 등 일본에게 [[제국주의]] 침탈을 겪은 나라여서, 한국과 비슷한 역사적 접점이 많다. 차이점이라면, 일제강점기 때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일본을 혐오하였고 창씨개명을 싫어하였지만, 대만은 [[대만일치시기]] 때 일본이 대만인의 창씨개명을 금지시키고 골수 친일파들에게만 창씨개명을 해주어 창씨개명한 대만인들은 이에 대해 상당한 자부심을 가졌다는 것이다. || [[파일:Chiang_Kai-shek_came_to_korea_to_see_Syngman_Rhee.jpg|width=100%]] || || 1953년 11월 27일, [[장제스]] [[총통]]과 [[아시아]] [[반공]] [[연맹]] 구상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[[대만]]을 방문한 [[이승만]] [[대한민국 대통령|대통령]]. || 일제통치 시절의 이런 인연으로 중화민국은 [[1948년]] 대한민국과 최초로 수교한 상징적인 국가가 되었다. 중화민국은 [[국제 연합]]의 상임 이사국이기도 한 만큼 한국에게 든든한 우군이었다. 그러나 [[제2차 세계 대전]]이 끝난 후 발발한 [[국공내전]]에서 패색이 짙어진 국민당은 [[국부천대|중화민국 정부를 난징에서 타이베이시로 옮기면서]] 거대한 중국 대륙의 주인에서 졸지에 외딴 섬나라 처지가 되고. 시골 촌구석 패거리에서 중국 대륙을 차지한 강대국이 된 [[모택동]]의 [[중국 공산당]]은 [[중화인민공화국]]을 건립하기에 이른다. [[냉전]] 시절에는 신생 공산국가인 중국과 북한을 견제코자, 진해에서 [[이승만]]과 [[장제스]]가 아시아 반공연맹을 창설할 정도로 [[반공주의]]의 혈맹 관계를 맺기에 이르렀다. 그러나 냉전이 점차 녹아가던 [[1992년]], 마침내 [[노태우]] 정부의 [[북방정책]]의 화룡점정으로 한국과 중국이 수교함과 동시에 단교하게 되었고 오랜 맹방관계는 소원해졌다. 민간 교류가 활발하며 [[워킹홀리데이]] 협약이 체결된 나라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